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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0 탕자시대 -부활- (눅 15:22-24)
작성일 :  2021-07-06 14:14
이름 :  admin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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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27). 탕자가 절대로 주려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탕자에게 있는 결정적 소망입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은 잊지 않는 사랑입니다.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자비의 사랑입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최절정의 사랑입니다. 마침내 탕자에게 임한 부활의 영광입니다. 무엇입니까? 1. 새 사람으로 새 옷을 입는 이것입니다(22절). 「제일 좋은 옷」은 왕자나 귀족들만이 입을 수 있는 진귀한 의상을 말합니다. 지금 아버지 앞에 온 탕자는 옛사람, 즉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가던 한사람 같이 강도를 만나 옷 벗김을 당한 상태였습니다(눅10:30). 과연 탕자는 모든 영광을 빼앗긴 자였습니다. ①수치스런 상태입니다(계16:15). ②술 취한 자의 상태입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수치를 자녀들에게 드러내었습니다(창9:20). ③귀신들린 자의 상태입니다(눅8:27). ④궁극적으로 옷 벗은 사람은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버림을 당할 운명에 있었던 사람입니다(마22:11-13). 옷은 사람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탕자는 본래 자기 옷이 아닌 죄악의 옷, 돼지를 치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탕자에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의미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믿음의 옷, 곧 칭의의 옷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대행의 공로를 우리가 값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지는 칭의 원리를 말함입니다(갈2:16). 이 칭의의 진리는 벌써 저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칭의의 작업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행사하심이요 동물의 희생이 수반된 이후에 이루어졌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함이요「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라고 했으니 사람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2. 새로운 계약체결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22절) ①이 가락지는 불변의 언약(계약)의 상징입니다. ②이것은 권리이양과 승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요셉에게 애굽왕 바로가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에게 끼우며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둘째 아들에게는 아들 된 지위와 권리가 되돌아 왔습니다. 이는 마귀에 속해 있던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본래의 신분이 회복됨을 뜻합니다. 권리이양을 받은 요셉은 온 애굽 땅을 순찰하고 풍년 곡식을 관리 했다가 흉년에 「모든 창고를 열고」곡식을 나누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새사람 된 자에게 이 세상의 모든 창고를 열도록 축복하십니다. 역사를 읽을 줄 아는 순찰의 눈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그 인격의 지성소가 활짝 열린 자에게 이 세상 지구 땅의 신비를 보게 하시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계각층의 분야에 창고의 문을 열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새사람이 받는 축복입니다. 순찰하여 파악하는 행위, 저축하는 행위, 창고의 문을 활짝 여는 그 행위, 그것이 곧 가락지로 인을 치는 문명작업의 사역입니다. 3. 자유하는 왕자입니다.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노예들은 신을 신을 수가 없습니다. 발목에 철끈을 매어 쇠고랑이 채인 것이 신이었습니다. 이는 노예로서 부자자유함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신을 신기라고 한 것은 위대한 자유의 선언입니다. 실로 모든 축복이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다시 부를 수 있는 자유입니다(롬8:15). 죄로 인한 온갖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아 누리는 회복의 자유입니다. 아버지가 주는 자유, 곧 진리가 주는 자유입니다(요8:32). 죄악에서의 자유입니다. 죄악의 결과인 사망에서의 자유입니다. 대적자(마귀)앞에서의 자유입니다. 송사자 앞에서의 자유입니다. 모든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위험, 칼에서의 자유입니다. 세세토록 아들로서 누리는 왕자적 영원한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입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이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에 이르기를 대망합니다. 그 대망의 정도는 탄식하며 고대하는 정도라고 했습니다(롬8:19-22). 성도들의 궁극적 소원 역시 몸의 구속(부활)을 기다리는 이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영육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케 되는 진리! 탕자시대, 탕자의 세계에서 탕자의 문명 속에서 허덕이던 탕자는 이제 새로운 문명을 맞았습니다. 새사람이 되어 새옷을 입고 그 확실한 보장으로 가락지를 끼고 자유하는 몸이 되어 신을 신었습니다. 그 결과 풍요한 낙원의 세계가 전개됩니다. 아버지는 기쁨 가운데 새 문명의 극치를 선언합니다.「살진 송아지를 잡으라」「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이유는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했습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다시 시작되는 풍요입니다. 부활의 세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탕자시대의 현대 문명은 몹시도 불안해하고 불만스럽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역사 앞에 추연한 모습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많이 즐기고 있는 현대! 그러나 많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듯이 보이는 현대! 그러나 아주 아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의 수많은 성도들과 순교자들은 극한 시련과 죽음의 운명 앞에서 웃고 갔습니다. 그러나 탕자 문명의 현대인들은 온갖 종류의 웃음을 보이지만 속에서 울고 있습니다. 불안과 체념, 절망속의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죄의식의 박약증에 걸려 있습니다. 저들의 사고에 하나님이 오히려 범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탕자시대가 안고 있는 저주입니다. 인간의 자율과 방종이 꾸며 놓은 정신적 바벨입니다.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멀리멀리 가게 했습니다. 이것들이 우리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도록 손해를 주었습니다. 궁핍의 불만을 주었습니다. 기생충의 고질병을 주었습니다. 돼지의 소굴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한없이 굶주림에 허덕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발하는 회개의 소리입니다. 미래는 아버지를 향한 부르짖음이요 그 발걸음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빛나는 영광이 있습니다. 새 옷입니다. 새 가락지, 새 신이 있습니다. 여기에 즐거움의 잔치가 있습니다. 곧 부활의 새 시대 새 문명이 있습니다. 나에게 가까이 계시는 아버지시여! 모든 피조물 중에서 찾지 못하는 용서와 사랑과 풍요는 아버지께만 있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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